코르코르디움

<공연리뷰> 연극 '크레이브'/'나의 검은 날개'


'크레이브'의 무대. 영상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진=강일중)

두 작품 모두 극 형식에 실험성

각각 영상·움직임 이미지 강해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객원기자 = '더블빌(Double Bill)'. 보통 영화에서 두 편을 동시상영할 때 쓰는 영어다. 아주 오래전 서울의 변두리 극장에서는 개봉관을 거친 영화 두 편을 모아 연속 상영하는 것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입장권 1매로 영화를 두 편 보는 것은 더블빌이 주는 매력의 하나였다. 요즘에는 해외의 무용 공연 안내문에서도 '더블빌' 또는 '트리플빌'이라는 용어를 자주 본다. 한 편에 20-30분짜리 소품 2편 또는 3편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공연이다.

서강대학교 내 메리홀 소극장 무대 위에 오른 '크레이브/나의 검은 날개'는 더블빌 연극이다. 더블빌이 대개 국립극단의 '단막극 연작'이나 '2인극 페스티벌' 같은 시리즈물에만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별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두 편은 기획시리즈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닌 각각 1시간가량의 작품들이다.

둘을 묶어 보여줄 만한 이유는 굳이 찾아보면 있다. 우선은 모두 극단 여행자(대표 양정웅)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극의 형식에 실험성이 있다는 것도 같다. 하나를 더 붙이면 두 작품 모두에 깊은 절망감이 깔렸다는 점이다.

'갈망하다'라는 뜻의 영어 제목 '크레이브'는 1999년 28세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영국의 천재 극작가 사라 케인이 죽기 직전 해에 쓴 작품이다.

테이블 왼쪽부터 B역 안태랑 배우-C역 장지아 배우-A역 김상보 배우-M역 김은희 배우. (사진=강일중)

양정웅 연출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무대화한 이 작품은 형식이 매우 독특하다. 이 작품에서는 영상 이미지가 거의 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상 비중이 크다. 전통적인 개념의 몸 연기는 없다. 영상으로 투사된 얼굴이 드러내는 표정연기만 있을 뿐이다. 희곡낭독회를 영상장비의 도움을 받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의 특이한 형식이다. 네 명의 배우는 무대 중앙에 각자 컴퓨터가 놓인 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각 배우 앞에는 영상카메라가 얼굴 높이로 서 있다. 카메라가 잡은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 영상은 무대 뒷면에 2X2의 큰 사각액자틀 형태로 투사된다. 배우들은 컴퓨터 화면의 대본을 보면서 극적인 대사치기와 표정연기를 한다.

영상에 나타난 표정이 핵심 이미지인 이 연극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사로 그득하다. 각각 두 명의 남자배우와 여자배우가 등장하지만 대본 상의 인물은 A,B,M,C라고만 설정되어 있고 성별 구별 또는 나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더구나 관객은 등장인물이 A,B,M,C인 것 조차 모른다. 이들이 토해내는 말들은 서로 의식하며 하는 대화가 아니다. 흡사 정신분열증이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 순간순간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말로 풀어낸 것 같다. 그 기억들이란 강간, 간음, 소아성애, 마약, 정신장애, 살인, 자살. 이런 것들이다. 가끔 이들 A,B,M,C 사이에 한 사람이 얘기한 데 대한 응답 느낌의 대사가 오가기는 하나 얼마 안 있어 연결고리는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등장인물은 넷이나 이들이 각자 하는 말들은 여럿이 아닌 한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다. 독백 같은 말이기 때문에 네 명이 서로 보는 일은 없다. 모두 거의 정면을 응시한 채, 때로는 절규하기도 하고, 미친 듯 웃기도 한다.

영상 속의 등장인물 표정과 대사를 통해 그의 아픔을 읽어내고 고통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연출된 작품이다. 대사는 난해하지만 영상과 하나하나의 언어가 주는 이미지가 워낙 강렬하고 시적이어서 아픔의 전이를 가속화시킨다.

배우들은 얼굴이 아주 깊게 클로즈업되어 공연시간 한 시간 내내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다. C 역을 한 장지아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양정웅 연출이 연극 작품에서 영상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 것은 최근 들어 이 작품이 두 번째다. 그는 앞서 국립극단의 '삼국유사 프로젝트' 중 하나인 '로맨티스트 죽이기'에서도 무대 위에 카메라맨을 배치, 등장인물들을 모습을 무대 뒤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하는 등 요즘 들어 부쩍 영상 쪽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크레이브'가 영상 이미지 위주의 연극인데 비해 더블빌의 다른 한 작품인 '나의 검은 날개'는 배우들의 움직임이 극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 작품은 알랭 드 보통의 저서 '불안'을 모티브로 출연진이 공동창작한 작품이다. 불안감을 초래하는 다섯 가지 요소, 즉 사랑결핍·속물근성·기대·능력주의·불확실성의 이미지를 몸짓과 대사로 풀어낸다. 이미지의 일관성은 있으나 각 장면 간에 직접적인 연결고리나 이야기 구조가 없는 콜라주 형태.

마임 동작을 통해 왕따 심리, 힘있는 자에 들러붙지 못할 때의 불안감 등을 표현하는가 하면 돌잔치 때 아기가 진짜 원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부모가 원하는 것을 억지로 쥐여주는 돌잡이 모습이 움직임으로 형상화된다.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여러 장면에 익살스러움이 담겨 있다.

'나의 검은 날개'의 한 장면. (사진=강일중)

일부 장면들의 몸동작이 너무 구체적이며 가벼운 마임 같은 느낌을 주면서 오히려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의 전달력을 약화시키는 듯 하다.

경제적인 문제에서 생기는 불안감을 소재로 한 가난한 맞벌이 부부의 장면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있다. 흔한 현실의 이미지를 너무 직접적인 대사로 꾸며내면서 아픔이 반감된다.

◇ 연극 '크레이브' = 만든 사람들은 ▲작 사라 케인 ▲번역 최영주 ▲연출 양정웅

출연진은 안태랑(B 역)·김은희(M 역)·장지아(C 역)·김상보(A 역).

◇ 연극 '나의 검은 날개' = 만든 사람들은 ▲연출 조최효정.

출연진은 한상훈·정수영·이화정·정종현·박미영·김호준·김수정·정정숙.

이상 두 작품의 공동 스태프는 ▲음향 이범훈 ▲조명 김성구 ▲음악 허안 ▲무대 이은규 ▲의상 이수왕 ▲움직임 김진곤·안현숙 (나의 검은 날개) ▲영상 윤세준 ▲무대감독 이대웅 ▲조연출 남승혜·이진경·강보라.

'나의 검은 날개'의 한 장면. (사진=강일중)

공연은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에서 오는 28일까지. 공연문의는 코르코르디움 ☎02-889-3561~2.

ringcycle@naver.com

Comment +0